정유사, 너도나도 화학기업 변신...곤혹스러운 석화업계

에쓰오일의 울산 아로마틱 콤플렉스 전경. 에쓰오일은 지난 8월 22일 2023년까지 울산 온산공장 인근 40만㎡ 부지에 연간 생산량 150만t 규모의 스팀 크래커를 짓기 위한 타당성 검토를 수행 중이라고 밝혔다.

업종 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현재 국내 산업계에서 업종 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상황이 가장 두드리지게 나타나는 분야는 정유업계와 석유화학업계다. 

두 업계는 '업(Up) 스트림(정유업계)'과 '다운(Down) 스트림(석유화학업계)'으로 상호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물려 있는 업계다. 정유업계가 수입해 온 원유를 정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나프타를 석유화학회사에 판매하면, 석유화학회사는 이 나프타를 가지고 '산업의 쌀'이라고 불리는 에틸렌을 포함한 다양한 석유화학제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런데 최근 이 두 업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정유업계가 기존 석유화학업계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에쓰오일은 지난달 22일 과거 현대중공업으로부터 사들인 울산 부지에 약 5조원을 투자해 에틸렌 생산시설을 짓는다고 발표했다.

이 회사는 2014년에도 4조8000억원을 들여 잔사유고도화시설(RUC)·올레핀다운스트림시설(ODC) 설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투자가 마무리되는 2023년부터 에쓰오일은 연간 150만t의 에틸렌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에쓰오일은 단숨에 국내 4위권 화학사로 올라선다. 현재 국내 주요 석유화학기업들의 에틸렌 생산능력은 LG화학 220만t을 비롯, 롯데케미칼(210만t), 여천NCC(195만t), 한화토탈(109만5000t), SK종합화학(86만t), 대한유화(80만t) 순이다. 정유사 에쓰오일이 어지간한 석유회학회사들을 앞선다.

이 뿐 만이 아니다. GS칼텍스 역시 GS그룹 투자계획을 통해 석유화학공정(MFC) 투자를 공식화했다. 전남 여수 제2공장 인근에 2조6000억원을 투자하기로했다. 이를 통해 연간 에틸렌 70만t과 폴리에틸렌 50만t을 생산할 계획이다. 

보통 에틸렌 생산설비는 나프타분해시설(NCC)로 표기하지만 유독 GS칼텍스는 NCC 대신 MFC라는 단어를 선택했는데, 그 배경도 사실 '영역 침범'을 의식한 탓이다.

앞서 LG그룹이 LG와 GS로 분리할 당시 두 그룹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로 한 약조한 바 있다. LG그룹은 LG화학이란 국내 석유화학업계 대표기업이 있다. GS칼텍스가 NCC를 짓겠다고 나선다면 이는 대놓고 영역을 침범하게 되는 셈이다. 이 탓에 NCC 대신 MFC라는 낯선 용어를 택했지만, 사실 다를 바 없다는 게 업계 평가다.

석유화학업계가 곤혹스러워 하는 것은 당연하다. 먹을 수 있는 '파이'는 한정적인데 '숟가락'이 늘어나는 걸 반길 리 없다. 그럼에도 정유업계가 중요한 고객사인 석유화학업계의 눈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을 넘을 수 밖에 이유는 마찬가지 빠르게 진보하고 있는 기술 때문이다.

정유사들이 파는 휘발유나 경유는 적지 않은 비중이 자동차 연료로 쓰인다. 그러나 내연기관을 사용한 자동차는 이제 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전기차 배터리를 만드는 석유화학업계는 오는 2020년을 전기차가 기술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변곡점으로 본다. 

이렇게 보면 결국 공생 관계처럼 보였던 정유업계와 석유화학업계는 서로의 밥그릇을 뺏고 빼앗는 관계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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