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래 한국예탁결제원 사장./사진:연합뉴스

 

"평소랑 크게 다르지 않은데 탓할 게 있나요? 항상 낙제였던 학생이 자기 실력만큼 성적을 냈는데 잘못했다고 하면 안 되죠."

유진투자증권 유령주식 사태와 관련한 한국예탁원 책임론에 대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의 얘기입니다. 반어법으로 표현한 이 말에는 예탁원에 대한 강한 비판과 뼈아픈 평가가 담겨 있습니다.

예탁원이 유진투자증권 유령주식 사태 발생 후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유진투자증권에서는 지난 5월 말 개인투자자 A씨가 보유한 미국 인버스 상장지수펀드(ETF) 주식 병합을 제 때 반영하지 않아 초과된 주식이 매도되는 사고가 났습니다.

A씨는 홈트레이딩시스템(HTS)으로 자신의 계좌에 있던 ETF 종목 665주를 전량 매도했습니다. 매도 전날 해당 ETF가 4대1 주식 병합을 해 A씨가 보유해야 하는 물량은 166주였습니다. 하지만 유진투자증권이 주식 병합을 늦게 반영하면서 사고가 터졌습니다.

유진투자증권은 수습을 위해 초과 매도된 499주를 사들였고 여기에 들어간 비용 1800만원가량을 A씨에게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A씨는 거부하면서 금융감독원에 분쟁조정을 신청한 상태입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유진투자증권의 잘못과 함께 예탁원도 책임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집중 예탁 의무가 있어 국내 개인 투자자가 해외주식에 투자하려면 예탁원을 통해야 하는 만큼 주식의 권리변화가 생기면 증권사에 신속히 알리는 동시에 시스템으로 뒷받침을 해야 하는 게 예탁원의 의무라 얘기입니다. 예탁원이 해외주식 보관에 관한 독점 권한만 없으면 권리변화를 알아서 반영해주는 해외 은행에 맡길 것이란 얘기도 합니다.

다시 정리하면 해외주식 권리 변화가 발생하면 예탁원이 정보를 즉시 통지하고 시스템으로 반영해준다면 사고 가능성도 줄고 권리변화에 따른 투자 기회 제약도 사라질 것이란 얘기입니다.

예탁원도 변명은 있습니다. 해외 시장에서 예탁원도 지위가 국내 증권사와 다름없고 해외 예탁원이 주식 병합에 관해서만 알려 줄 뿐 날짜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정보를 주지 않아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증권사에 자신이 얻은 정보를 주는 것으로 할 일은 끝나고 책임은 증권사에 있다는 얘기도 합니다.

요컨대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아무것도 안 한다는 말입니다. 금융투자업계에서 '예탁원답다'란 평가가 나오는 대목입니다. 이번 사태의 구체적인 책임 여부를 떠나 예탁원의 평소 인식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 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안 해도 돈은 많이 받는 곳'. 예탁원에 대해 들었던 가장 많은 평가 내지 정의입니다. 아마도 이런 정의가 틀렸다고 얘기할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예탁원이 유진투자증권 유령주식과 관련해 억울함을 토로하면서도 해외에서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얘기가 없다는 것도 이런 정의를 방증합니다. 억울하면 티끌만 한 근거라도 대면서 항변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으니 말입니다.

유진투자증권 유령주식 사고가 터진 것은 예탁원이 금융당국 등과 함께 국내 증권사의 주식매매 내부통제시스템을 점검하던 때입니다. 예탁원은 여기서 무엇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공동 점검을 했던 금감원, 한국거래소, 금융투자협회, 코스콤 등 다른 기관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식 권리 변동과 관련된 것은 누가 봐도 예탁원이 챙겨야 할 부분입니다.

삼성증권 배당사고를 계기로 시작된 것이고 금감원이 주도한 일이라 해외주식 얘기는 할 수 없었다는 식의 핑계는 어불성설입니다. 최대한 양보해서 이번에는 말할 수 없었다면 그동안은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국내 개인들이 해외 주식에 투자한 게 10년이 넘었습니다.

예탁원은 정기적으로 해외주식 투자 관련 자료를 내놓고 있습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자료의 내용은 대부분 '사상 최대'나 '급증' 등 해외주식 투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데이터를 집계하면서 유진투자증권과 같은 사태가 벌어질 수 있고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 했다면 예탁원의 의식 수준은 상식 이하란 평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식했지만 아무것도 안 했다면 예탁원은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할 일이 없는 사람, 일하지 않는 사람은 조직을 떠나야 하고 할 일이 없는 조직은 사라지는 게 당연한 이치입니다.

예탁원의 평균 연봉은 1억1000만원에 달합니다. 공공기관 중 가장 많고 편의점주들이 가져가는 돈의 5배나 됩니다. 편의점 5개를 운영해야 벌 수 있는 돈을 받는 예탁원 구성원들이 연봉만큼 가치 있게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노력이라도 하고 있는지 예탁원만 빼고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유진투자증권 사태를 계기로 쏟아지고 있는 비판을 깊이 새기고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지 못한다면 예탁원의 안녕은 길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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