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복 악순환 둘 다 '승자 없는 게임'

사진=연합뉴스

글로벌 무역전쟁에 나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젠 환율전쟁을 벌일 태세다. 시장에선 올 게 왔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무역전쟁과 환율전쟁이 사실 동전의 양면 같아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일 트위터에 "미국은 불법적인 환율조작과 나쁜 무역협정 때문에 잃은 걸 되찾아야 한다"고 밝혔다. 나쁜 무역협정에 무역전쟁으로 맞선 것처럼 불법적인 환율조작에도 정면 대응할 수 있다는 얘기 같다. 바로 전날 그가 중국과 유럽연합(EU)의 환율조작 의혹을 문제삼으며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에 개입한 것만큼이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트럼프 대통령은 19일 CNBC 방송의 '스쿼크박스' 프로그램 인터뷰를 통해 "나는 (금리인상이) 달갑지 않다"며 "경기가 상승할 때마다 그들은 금리를 다시 올리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정말 그게 반갑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들은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를 가리킨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히 금리인상이 유로와 중국 위안화에 대한 달러 강세를 촉발했다며, 이는 미국에 불리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EU는 돈값을 낮추고 통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으며 중국 통화는 돌멩이처럼 추락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달러 강세로 미국의 수출 경쟁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최근 돋보였던 달러 강세에 일시적으로 제동을 걸었을 정도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전임자들이 지난 20여년간 터부시한 통화정책 개입 발언을 한 게 워낙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트럼프의 환율 공세 의지가 그만큼 강하다는 의미로 소화했다.

샤하브 잘리누스 크레디트스위스 외환투자전략가는 블룸버그에 다른 나라들이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환율을 조작하고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환율전쟁의 정의와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트럼프의 발언이 환율전쟁 선전포고와 다를 바 없다는 얘기가 돌고 있는 이유다.

환율전쟁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경쟁적으로 통화 가치를 낮추는 걸 말한다. 통화 가치를 떨어뜨리면 수출품 가격을 낮추고, 수입품 가격은 높일 수 있다. 자국 수출 경쟁력을 높이면서 무역 상대국을 궁지로 몰아넣게 된다. .환율전쟁이 '이웃 나라를 거지로 만든다'(Beggar Thy Neighbor)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트럼프의 환율전쟁 선전포고는 사실 새로운 게 아니다. 그는 취임 직후인 지난해 2월 백악관에 미국 제약업계 대표들을 불러 모은 뒤 "여러분은 수년간 중국과 일본이 뭘 하는지 보고 있다"며 "그들은 자금시장과 평가절하시장을 갖고 놀지만 우리는 바보들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다"고 말했다.

중국과 일본이 통화완화정책으로 위안화와 엔화의 평가절하를 유도해 수출에서 이익을 보는 사이 미국은 당하고만 있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미국은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한 무역에서 막대한 적자를 봐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기간 내내 중국과 일본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고 별렀다.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잇딴 환율조작 문제제기가 결국 달러 강세론자들을 겨냥한 것일 수 있다고 본다. 미국 정부는 1990년대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부터 달러 강세를 신조로 여겼다. 강력한 미국 경제엔 강력한 달러가 제격이라는 신념에 따른 것이다. 달러 강세는 미국 국채 수요를 뒷받침하는 배경으로 미국의 재정정책을 떠받쳤다.

트럼프 대통령도 강한 미국, 미국 우선주의를 강조하지만, 그에게 달러는 명분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 미국 우선주의에 기반한 보호무역정책의 도구로 쓰기엔 달러 약세가 더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은 22일 회견에서 환율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노'(No)라고 답했지만, 일관성 있는 트럼프의 발언 탓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전 세계가 이미 '환율냉전'(cold currency war)에 돌입했다는 진단이 나온 지 오래다. 환율냉전은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자국 통화의 약세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자산매입, 금리인하 등 노골적인 유동성 공급책을 동원한 종전의 환율전쟁과 다르다. 재래식 무기를 쓰지 않고 힘을 겨룬 미국과 소련의 냉전에 빗댄 말이다. 

문제는 무역전쟁이 그렇듯 환율전쟁 역시 보복의 악순환을 일으켜 승자 없는 게임으로 끝나기 쉽다는 점이다. 더욱이 통화 가치를 과도하게 낮추는 데 따른 역효과도 상당하다. 수입 물가 상승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질 수 있고, 자본 유출을 부추길 수 있다. 외채 상환 부담도 커진다. 환율 변동성이 커지면 외국인들은 투자를 꺼리게 된다. 한국을 비롯해 외부 변수에 취약한 신흥시장이 환율전쟁의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는 경고가 줄을 잇는 이유다.

미국 월가의 유력 애널리스트로 '환율전쟁', '화폐의 몰락' 등의 저서로 유명한 제임스 리카즈는 최근 금융뉴스레터 '데일리 레커닝'에 쓴 글에서 부채가 과도하게 많고 성장률이 낮아 침체 위험이 커지면, 무역전쟁과 환율전쟁으로 무역상대국에서 성장세를 훔쳐오려는 경향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0년대 두드러졌던 일로 당시 갈등은 결국 2차 세계대전을 촉발하는 데 일조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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