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 사진제공: 연합뉴스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갑질' 나비효과가 일파만파 커지고 있습니다. 조 전 전무의 어머니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은 폭행 혐의가 불거졌고 잠시 잊혔던 언니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의 기억을 되살렸습니다. 

두 자매와 어머니의 부적절한 행위가 합쳐지면서 내부에 잠재해 있던 울분과 분노를 자극했고 관세 탈루, 명품 밀수 등에 대한 폭로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서울 도심에서는 조양호 회장 일가를 규탄하고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국토부는 진에어의 항공면허 취소도 검토 중입니다. 미국 국적인 조현민 전 전무가 2010년부터 6년간 진에어의 등기이사를 맡은 것이 항공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한 데 따른 조치입니다. 국내 항공법상 외국인은 국가 안보 등을 이유로 국내 항공사의 등기이사가 될 수 없습니다. 국토부는 현재 3곳의 로펌에 법리 검토를 맡겼고 그 결과에 따라 취소 여부를 결정할 예정입니다.

현재는 면허 취소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법적·행정적 제재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양호 회장은 진에어의 대표이사직을 내려놨습니다. 대표이사가 된지 49일만입니다. 사내이사직은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이를 두고 꼼수 사퇴란 지적이 나옵니다. 대표이사가 져야 하는 책임은 회피하면서 사내이사로 경영에는 관여하겠다는 뜻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국토부가 진에어를 제재하기 위해서는 대표이사 등을 불러 청문 절차를 진행할 텐데 이 자리에 조양호 회장이 나가지 않으려한다는 해석입니다.

조양호 회장의 꼼수를 보면서 2년 전 해운업 구조조정 때의 한진해운 사태가 떠오릅니다. 당시 산업은행을 중심으로 한 채권단은 현대상선과 한진해운 두 곳을 대상으로 자율협약을 맺고 정상화를 위한 노력을 했습니다. 

현대상선은 채권단의 지원을 받으면서 살아남았고 한진해운은 채권단의 지원을 받지 못해 법정관리를 신청한 뒤 파산까지 이르렀습니다.

두 회사의 운명은 대주주의 대응에서 갈렸습니다. 채권단은 대주주의 고통 분담을 전제로 한 지원을 원칙으로 제시하면서 원칙에 맞는 자구안을 요구했습니다. 현대상선은 채권단의 원칙에 따랐고 한진해운은 그 반대였습니다.

한진해운이 정상화를 위한 자율협약을 신청하고 법정관리로 가기까지 4개월 정도가 걸렸습니다. 

채권단은 자율협약이 종료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법정관리 가능성을 경고하면서 고통 분담을 요구했지만 한진 측은 자율협약 초기 퇴짜를 맞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을 최종 자구안으로 내면서 채권단은 신규 지원 불가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동걸 당시 산업은행 회장이 조양호 회장을 직접 만나기도 했습니다.

채권단은 원칙을 지켰지만 한진해운의 법정관리 파장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한진그룹도 계속 버티면 채권단이 한진해운을 살려야한다는 여론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지원을 해주지 않겠냐면서 안일하게 대응했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비판을 받았습니다. 일부에서는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차치하더라도 가족을 포함하면 수만명의 생계가 달린 일에 조양호 회장이 그 정도로 무책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면서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몇 달 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진 뒤 한진해운 법정관리에는 최순실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한진그룹은 피해자가 됐습니다.

당시 주장은 조양호 회장이 최순실의 사익 추구에 방해물로 찍히면서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에서 쫓겨났고 채권단의 지원 불가 결정도 같은 맥락이란 것이었습니다.

논리는 다르지만 해운업 구조조정 초기에 현대상선과 한진해운 중 한 곳만 살릴 것이란 설이 있었던 터라 어느 정도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최근 조양호 회장의 꼼수를 보면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다는 얘기가 더 사실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진에어의 위기는 자신의 딸이 촉발했고 내부로부터 터져 나오는 목소리도 조양호 회장 자신의 가족들이 편익만을 취하려는 데서 출발했지만 책임이란 것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기 때문입니다.

아무렇지 않게 법을 어기고 직원들을 하인처럼 부리는 갑질을 해 온 게 최소 십여년은 됐다는 것을 생각하면 최순실 국정논단 사태 청문회에 나와서 한진해운 법정관리에 억울함이 있다고 호소할 자격이 있었는지도 의문입니다. 1만원을 훔치든 100만원을 훔치든 도둑은 도둑이니 말입니다.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 사전에 정의된 책임이란 말의 의미입니다. 그동안 조양호 회장 자신과 가족들이 왕 노릇을 하느라 고통 받은 사람들과 회사에 입힌 손해를 만회하고 보상해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행동하는 것이 지금 조양호 회장이 해야 할 의무입니다. 갑질 등으로 제기되는 소송이 있다면 조양호 회장 개인의 비용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도 의무입니다. 본인과 자식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부담을 더이상 회사에 미루지 않는 것도 의무이니 말입니다.

싱겁게 먹으려고 소금을 잔뜩 넣었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책임을 피하려 한다고 그동안의 잘못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비난만 초래할 뿐입니다.
 

저작권자 © 비즈니스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