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화기기(ATM)에서 1만원 출금 누르면 수백만원이 나올 수도 있었는데 아쉽네요. 비트코인으로 대박 난 사람들이 부럽지 않을 상황이었는데요."

얼마 전 만난 시스템 통합(SI) 업계 관계자가 우리은행 차세대 시스템 도입 연기를 두고 던진 농담입니다. 우스갯소리였지만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뼈가 담긴 말입니다.

우리은행은 차세대시스템을 도입을 위해 설 연휴 기간(2월15~18일) 인터넷뱅킹과 모바일뱅킹, ATM, 체크카드 등 모든 금융거래를 중단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러나 차세대시스템 도입을 불과 이틀 앞둔 지난달 13일 오전 갑작스럽게 금융거래를 중단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거래 중단을 40시간도 남기지 않은 시점입니다.

우리은행은 명절 전후 이체 및 현금 거래량 증가와 이에 따른 고객 불편을 최소화시키고 거래안정성과 고객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습니다. 은행의 금융거래를 중단해야 하는 중대한 문제에 대한 변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군색합니다.

우리은행이 차세대시스템 개발에 착수한 것은 2016년 3월입니다. 2년 전에는 그리고 지난해에는 명절 전후 이체와 현금 거래량 증가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손태승 우리은행장이 단 0.001%의 오류도 나와서는 안 된다면서 일정을 늦추더라도 완벽한 상태에서 차세대시스템을 가동하란 지시를 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손 행장이 왜 거래중단 이틀 전에야 연기를 결정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우리은행의 차세대시스템 가동 연기 가능성은 4~5개월 전인 지난해 하반기부터 제기됐습니다. 차세대시스템에 대한 테스트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시점입니다.

다수의 SI업계 관계자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우리은행 차세대시스템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의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입출금이나 여·수신 등 돈이 오가는 기본적인 기능만 제대로 작동했다면 예정대로 차세대시스템을 가동한 뒤 문제를 수정해나가는 게 신뢰나 비용면에서 모두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시스템은 컴퓨터로 일정한 공식에 따라 만들지만 개발자에 따라 시스템을 구현하는 방식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10(시스템)이란 답을 내는 데 영희는 5+5, 철수는 1+9란 과정을 거칠 수 있는 것과 같은 구조입니다.

완벽히 통일된 양식으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테스트를 거쳐도 실제 가동됐을 때는 오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통상 새로운 시스템을 오픈한 뒤 안정화라는 과정을 거치는 이유입니다.

안정화는 집에 새로운 가구를 들일 때 종이를 깔아서 수평을 맞추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중대한 문제는 아니지만 조금 더 보기 좋은 모습으로 더 안전하게 가구를 두고 쓰는 데 필요한 미세조정 정도 말입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보면 우리은행의 차세대시스템은 책꽂이를 주문했는데 냉장고가 배달된 수준의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추론입니다.

손 행장은 어째서 냉장고가 서재로 반쯤 들어갔을 때 반품을 지시했을까요. 배달 차량이 대문 앞에 도착해 현관문을 통과할 때까지 몰랐기 때문일까요? 어쩌면 냉장고를 책꽂이로 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요?

최근 SI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우리은행이 5월에 차세대시스템을 정상 가동할 수 있을지를 두고 내기를 한다고 합니다. 대다수는 '어렵다'에 걸고 있어 내기가 성립되지 않고 있지만요. 우리은행이 차세대시스템을 오픈하기 전에 돈을 다 빼야겠다는 얘기도 많이들 한다고 합니다. 일반 고객은 몰라도 시스템을 좀 안다는 사람들은 우리은행 차세대시스템 가동 연기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고객들은 조금 불편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더 편하고 안전한 금융거래를 위한 것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애써 모은 돈이 사라진다는 것은 절대 참지 못합니다. 이런 일이 생길 가능성이 있는 은행에서 돈을 빼려는 것은 당연합니다. 은행 스스로 신뢰를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티끌 만큼의 오류도 없어야 한다는 손 행장의 말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싶지 않습니다. 손 행장이 원치 않게 거짓말쟁이가 되고 우리은행이 고객의 신뢰를 잃는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을 보면 이런 바람은 무너질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2년 동안 수천억원을 쏟아붓고 1000만명이 넘는 고객들에게 했던 약속을 어기는 상황을 만든 책임자가 석 달 만에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 높지 않다고 보는 게 상식적 입니다. 축구 국가대표팀을 수년간 팀을 이끈 감독을 월드컵 몇 개월 전 바꾸는 일을 심심치 않게 목격합니다. 경질 위기에 처한 감독은 부진의 근본적 원인을 찾아내고 개선하기보다 눈앞의 성적을 위해 무리한 선수기용과 훈련에 집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수단 운영은 월드컵을 치른 뒤 선수와 팀 컨디션이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지는 원인이 됩니다.

우리은행 차세대시스템 관련 부서와 계열사 직원들은 평일 밤 9~10시까지 사무실에 있고 주말에도 출근하는 비상근무 체계에 들어갔습니다. 중대한 일이니 직원들의 인권을 들먹이면서 야근과 주말 근무까지 일을 시켜야 하느냐고 따질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차세대시스템 개발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거나 당장은 시스템 개발과 관련해 할 일이 없는 직원도 비상근무에 반강제적으로 투입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직원들의 피로감은 뒤로하더라도 비상근무로 발생하는 비용은 모두 고객 부담입니다. 오류를 줄이는 것뿐 아니라 이미 일정이 길어지면서 발생하는 추가적인 비용을 줄이는 것도 손 행장이 신경 써야 할 일입니다.

오는 5월 완벽한 차세대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전사적인 노력을 했지만 원하는 수준까지 준비되지 않아 한 번 더 연기할 수밖에 없다는 핑계를 만들려는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우리은행이 아무리 부인해도 심각한 내부 문제가 있다는 외부의 시각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손 행장의 0.001% 발언의 진정성이 의심받지 않고 막대한 추가비용이 들어가는 비상근무가 심각한 내부 문제로 신뢰가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는 방패막이로 비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차세대시스템 가동 연기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와 책임 소재부터 분명히 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체계로 움직이고 있는지부터 점검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은행의 차세대시스템 연기가 비트코인 투자 기회를 앗아간 것과 같다는 비아냥을 듣고 싶지 않다면 내부를 돌아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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