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바뀌었으니 또 시작이 된 것이겠죠."

최근 최고경영자(CEO) 교체설로 홍역을 치르고 있는 한 대기업 임원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권 교체기 때마다 특정 기업을 상대로 CEO 흔들기 관행이 반복돼 온 데 대한 불만의 표시이기도 했다.

지난해 5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다수의 공기업 수장이 교체됐다. 임기가 남았거나 연임에 성공했지만 단지 전 정권 때 임명됐다는 이유만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CEO들이 많다.

대통령 개인이 혹은 정권 차원에서 이들 기업으로부터 뒷돈을 받을 게 아니라면 인사에 관여하는 목적은 단순하다. '보은' 또는 '코드' 수식이 붙는 이유다.

민간 영역에 대한 인사 개입은 더 큰 문제다. 지난 십수년 동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난을 겪은 포스코와 KT가 대표적이다.

각각 포항제철에서 포스코로, 한국통신에서 KT로 간판을 바꿔 달며 민영화했지만 여전히 국민연금이 지분 11% 이상을 보유한 최대주주로 정부 입김이 미칠 여지가 크다.

권오준 포스코 회장과 황창규 KT 회장도 어김없이 정권 불신임설에 휘말렸다. 재계가 우려섞인 시선을 보내는 근거가 있다.

두 사람 모두 문재인 대통령의 해외 순방 때 한 번도 경제사절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의도적인 배제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포스코의 경우 전·현직 임원의 채용비리 의혹이 불거졌다. 문재인 정부 들어 '채용비리' 덫에 걸려 낙마한 CEO가 여럿인지라 '이번에도'라는 의구심이 제기된다.

평창 동계올림픽 공식 후원사인 KT는 최근 경쟁사인 SK텔레콤과 얼굴을 붉혔다. 공식 후원사가 아닌 SK텔레콤이 김연아를 내세워 대대적인 응원광고를 한 게 발단인데 정부가 SK텔레콤의 행보를 묵인했다는 전언이다.

황 회장은 지난해 10월 국정감사 때도 고액연봉 논란과 최순실 게이트 연루 의혹 등으로 여당의 십자포화를 맞은 바 있다.

일각에서는 평창 동계올림픽이 끝난 뒤부터 3월 도래할 주주총회 시즌 전까지 권 회장과 황 회장의 거취가 결정될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두 사람은 공히 오는 2020년까지 연임이 확정된 상황이지만 불명예 퇴진만 아니라면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권으로 눈을 돌리면 김정태 하나금융지주 회장의 입지가 위태로워 보인다. 김 회장은 3연임 도전을 공언했는데 금융당국 수장들이 '셀프 연임'이라며 비판하고 나선 탓이다.

김 회장이 임명한 사외이사들로 구성된 회장후보추천위원회가 연임 여부를 결정하는 구조가 문제의 발단이다.

'관치' 논란이 일자 최흥식 금융감독원장이 "김 회장의 연임을 막을 의도는 없다"며 다소 누그러진 발언을 내놨지만 경쟁 체제를 갖춰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김 회장에 대해서는 "오너도 아닌데 지나치게 친정 체제 구축에 몰두한다"거나 "장기 집권을 위해 2인자를 키우려 하지 않는다"는 등의 지적이 나온다.

하지만 결국 핵심은 금융권 길들이기의 일환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포스코와 KT, 하나금융 등 오너가 없는 기업의 전문경영인은 언제나 주주 가치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정부의 압박으로 CEO 리스크가 발생했다면 이를 관리·해소할 책임 또한 전문경영인에게 있다.

다만 이같은 비즈니스 논리에도 불구하고 횡령·배임 등 범죄 혐의나 실적 악화 등 경영상 실책이 없는 CEO를 무리하게 내쫓으려는 시도는 절대 용납될 수 없다.

상술한 기업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현 정부와 무관하다면, 문재인 정부가 민간 영역에 대한 '낙하산 인사' 적폐를 답습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면 지금이라도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아니다'라는 시그널을 확실히 전달해야 한다.

저작권자 © 비즈니스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