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판결이 이뤄진 지난 3월 10일.

이정미 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미르·K스포츠재단을 설립해 최서원(최순실)의 이권 개입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준 피청구인의 행위는 기업 경영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며 파면 결정을 내렸다.

"기업으로부터 1원도 받지 않았다"는 박 전 대통령의 주장이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기업인이 건넨 돈이 대가성 뇌물인지 여부에 대한 법적 판단이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핵심은 최고권력자가 특정인의 사익 편취를 돕기 위해 기업을 압박했던 것이 파면 결정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역대 대통령들도 권력 유지를 위한 재계 길들이기 유혹을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치며 집권한 문재인 대통령은 다를까.

아쉽게도 문재인 정부를 향한 재계의 코드 맞추기 징후가 여기저기서 감지된다.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묵시적으로는 그렇다.

지난 12일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대기업 간담회 1순위로 LG를 찾은 게 대표적이다. LG는 재계 4위다. 1~3위를 제쳐두고 LG를 방문한 데 대해 뒷말이 많다.

지배구조 개선이나 상생 협력 투자 등에서 정부 방침에 가장 협조적이었던 기업이 LG라는 것이다. 김 부총리도 "LG는 여러 모범을 보인 기업"이라며 "대한상공회의소와 함께 고민하다가 LG를 처음 찾게 됐다"고 말했다. 말 잘 듣는 곳부터 방문했다는 의미다.

이후 청와대 핵심 인사가 8대 그룹 경영진과 비공개 만찬을 하려다 취소된 사연을 들으면 더욱 기가 막힌다. 기업인들의 애로를 청취하고자 만든 자리인데 참석자들의 급(級)이 너무 높았던 게 문제였다.

부사장급 또는 실무 임원 참석을 요청했지만 정작 리스트에는 윤부근 삼성전자 부회장, 정진행 현대차 사장, 장동현 SK(주) 사장, 하현회 (주)LG 부회장, 황각규 롯데 사장, 오인환 포스코 사장, 홍순기 (주)GS 사장, 여승주 한화 사장 등이 이름을 올렸다.

참석자 명단을 전달받은 해당 인사조차 깜짝 놀랐다는 후문이다. 대통령과 청와대의 의중을 모르니 일단 고위급이 가겠다고 먼저 자세를 낮춘 것이다.

정권 눈치보기는 일선 경영 현장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이뤄지고 있다. S그룹은 내년 초 일부 계열사를 대상으로 구조조정을 계획 중인데 정부의 일자리 창출 기조와 상반돼 고민에 빠졌다.

H그룹과 또다른 S그룹은 문 대통령이 방중 기간 중 충칭을 방문했을 때 공장 시찰 동선을 놓고 신경전을 벌인 바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 공식 후원사가 아님에도 막대한 금액을 투자해 올림픽 홍보에 나선 기업의 사례도 들린다.

상황이 이렇다면 문 대통령 혹은 권력 실세들이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새로운 정경유착의 악순환 고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 박영수 특별검사는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국정농단 사건을 "국내 최고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간의 유착"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정치권도 재계도 마음에 새겨야 할 말이다. '이니'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국민적 사랑을 받는 문 대통령의 도덕성이나 선의(善意)만 믿고 제2의 국정농단 사태가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기에는 최근 일련의 동향이 찝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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