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을 놓고 뒷말이 많다. 외신에서는 혼란스럽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북 압박 강화를 위한 공감대를 확인하고 비즈니스맨답게 일방주의 통상전략으로 실리를 챙겼다는 평가가 있지만 의문이 남는다.

당장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 압박 카드를 쥐고 있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구체적인 북한 문제 해법을 도출하지 못했다. 시 주석은 마오쩌둥이 단 한 번도 들어서지 않았다는 자금성을 전세 내 트럼프를 맞는 파격을 보였지만 두 정상은 공동성명조차 발표하지 않았다.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으로 달라진 게 사실상 없는 셈이다. 중국은 북한이 핵·미사일 도발을, 한국과 미국은 군사훈련을 동시에 중단(쌍중단)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눈에 띄는 변화는 오히려 미국과 중국 주변에서 일어났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과 관련해 '중국이냐, 미국이냐'는 질문에 아시아 국가들이 한 대답은 '둘 다 아니다'였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아시아에서 미국의 쇠퇴는 곧 중국의 부상을 의미했다. 중국은 이미 미국과 어깨를 견주는 세계 양강(G2)으로 자리를 굳혔다. 지난달 제19차 당대회에서 1인 지배체제를 확실히 굳힌 시 주석의 광폭 행보는 중국이 미국의 세계 패권을 차지할 수 있다는 관측에 힘을 실어줬다. 시 주석이 유럽까지 육지와 바다를 아우르는 신실크로드를 놓겠다며 추진하는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중국의 부상을 둘러싼 상상력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그러나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에서는 미국의 패권은 물론이고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이 주도하는 평화)가 '팍스 시니카'(중국이 주도하는 평화)로 바뀌는 시나리오에 의문을 제기하는 신호가 여럿 포착됐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부활 움직임이 대표적이다. TPP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시절의 미국과 일본이 주도해 마련한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올 초 취임하자마자 탈퇴를 선언하면서 비준만 남은 TPP는 사실상 끝났다는 진단이 많았다. 대다수 참가국이 미국시장을 노리고 협정에 들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트럼프의 TPP 탈퇴가 협정에 남은 11개국이 중국으로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중국이 미국의 빈자리를 메우기 쉽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안 그래도 중국은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주도해왔다.

일본과 호주, 뉴질랜드 등 11개국은 미국과 중국을 모두 배제하는 길을 택했다. 이들은 지난 11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린 베트남 다낭에서 자기들끼리 '포괄적·점진적 TPP'(CPTPP)를 추진하기로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 첫 방문지인 일본에서는 미국·일본·호주·인도 등 4개국 체제가 '인도·태평양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4개국 체제는 원래 2007년 처음 태동했지만 케빈 러드 당시 호주 총리가 최대 교역국인 중국의 반발을 우려해 발을 빼 1년 만에 흐지부지됐다.

하시 팬트 영국 킹스칼리지 교수는 호주가 이번에 마음을 바꾼 건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무능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인도·태평양 전략을 강조해온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공도 컸다. 그는 2007년 인도 의회 연설에서 인도·태평양의 자유와 번영을, 2012년에는 4개국을 '다이아몬드'라고 칭하며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번에 힘을 보태긴 했지만 인도·태평양 전략은 결국 중국의 부상을 둘러싼 불안과 미국의 대응능력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됐다고 WSJ는 지적했다.

주목할 건 미국과 중국이 모두 아시아에서 시야를 넓히고 있다는 점이다. 시 주석은 필리핀 마닐라에서 아세안 정상들과 만나 남중국해 영유권 갈등을 일부 잠재웠고 트럼프 대통령은 마닐라에서 아세안 정상회의와 함께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 참석하기 위해 아시아 순방 일정을 하루 연장했다.

WSJ는 아시아의 지역 패권구도가 변하고 있는 건 확실하지만 결과를 예측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중국이 미국의 희생 아래 세력을 키우고 있는 것 같지만 아시아의 미래를 좌우할 세력은 이제 막 드러나기 시작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이 더 이상 동북아시아의 미·중·일 체제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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