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파기환송심에서 국정원법·선거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지난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구치소로 향하기 위해 호송차에 오르고 있다. / 사진제공: 연합뉴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국가정보원장과 독대한 적이 없다. 노 전 대통령이 국정원장과 만날 때에는 반드시 비서실장이나 연설기록비서관 등과 함께였다. 왜 그랬을까. 국내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보유하고 있는 기관의 장과 단둘이 만나면 여러모로 ‘유익’했을 텐데. 단지 철저한 민주주의자인 노 전 대통령의 ‘투명한 국정운영’에 대한 원칙 때문이었을까. 

이에 대해 유시민 작가가 어느 강연에서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국정원 직원들이 가장 잘 하는 게 보고서 만드는 일이다. 각계각층에서 수집한 정보를 분석하고, 사회적 주요 이슈를 분류해서 해결책까지 보고서에 담는다. 역대 정권에서 모든 국정원장들은 정기적으로 대통령들을 만나 보고서들을 건넸다. 가령 다음 주 대통령이 어떤 부처 장관과 특정 사안에 관해 회의를 할 예정이라고 하면, 그 부처를 담당하는 국정원 직원들은 그 사안에 대해 이미 부처 공무원들로부터 받은 정보와 사회적 영향 등을 분석해 보고서를 만든다. 국정원장은 대통령을 만나서 이 보고서를 건넨다. 말하자면 국정원장이 다음 주 회의에 대해 ‘조언’을 하는 것이다.”

“누가 봐도 그 보고서는 그럴 듯해 보인다. 대통령은 편하다. 회의에서 장관에게 ‘너는 그것도 모르냐’며 질책할 수도 있고, ‘이렇게 하라’고 지시할 수도 있다. 국정원 보고서 덕택이다. 그러니 더 신뢰하게 된다. 똑똑하지 못한 대통령들은 더 그렇다. 이렇게 되면 ‘국정원이 국정 운영을 하게 되는 결과’가 나온다. 국정원이 좌지우지하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 전 대통령은 그런 점을 우려했고, 국정원장과 독대하지 않았다. 그러니 국정원장은 제3자의 눈이 있는 곳에서 그런 보고서를 건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라는 원칙 아래 어쩌면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실행에 옮겼다.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국정원이라는 이름의 정보기관은 분명 ‘유혹’이다. 국가기밀이라는 이유로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없는 예산, 상명하복에 철저한 인적 구조, 최고급 국내외 정보 등 마음만 먹으면 이 조직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 

은밀하게 이용만 하면 국민들이 알 길이 없으니 믿고 쓰는 조직이다. 설사 들킨다 해도 다른 ‘공작’이 들어가면 흐지부지 없었던 일로 넘어갈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유용한 ‘도구’인가. 역대 대통령들은 이 조직을 이용해 자신에게 비판적인 정치인이나 언론인들의 약점을 찾아내고(혹은 만들어내고) 짭짤하게 써먹었다. 기업인은 말할 것도 없다.

전직 국정원장이 법정 구속됐다. 많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정권 색깔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사법부의 판단은 매우 유감이지만 일단 단죄가 이뤄졌다는데 의의를 두자. 돌이켜 보면 원세훈 전 원장은 국정원이라는 정보기관의 본연의 역할, 국정원장이라는 자리의 소명에 무지했거나, 알고도 무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람에게는 국민을 대상으로 한 사이버 심리전단을 운영해 국내 정치와 선거에 개입한 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죄, 국가를 분열시킨 죄, 국민 안전과 건강을 훼손한 죄, 국정원의 권위와 신뢰를 추락시킨 죄 등 이루 말할 수 없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박근혜 정권의 ‘문화계 블랙리스트’처럼 MB정권에는 ‘원자력 블랙리스트’가 있었다고 한다. MB정권이 원자력 발전 활성화에 집중하던 시기에 대형 악재가 터졌는데 이웃 일본의 대지진 여파로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한 사고가 그것이다. 국정 기조가 원자력 활성화인데 국민들이 일본으로부터의 방사능 유입을 걱정하고 있으니 먹힐 리가 없다. 그런데 이 와중에 환경부 국장급 공무원이 갑자기 ‘사직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 방사능 유입이 식수원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 판단하고, 식수 정화시설에 가림막을 설치한 것이 화근이었다.

국정원 내부에서 “이 공무원이 좌파이기 때문에 이런 짓을 한다”며 환경부에 퇴직을 종용했다고 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국민 건강을 위해 일한 공무원을 빨갱이라 매도하며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 이런 짓을 하다니 믿기조차 어렵다. 또 당시 국정원은 한 연구소가 실시한 일본 방사능 유입 통계도 국민들에게 공개하지 못하도록 압박했다고 한다. 부정한 권력이라고 하는 게 바로 이런 것이다. 종합적으로 보면 원 전 원장은 국가와 국민에 충성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과 정권에 철저히 충성한 사람이다.

이제 국민들의 시선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향하고 있다. 국민들은 과연 국정원장이 독단으로 이런 죄들을 저질렀는가에 대한 합리적인 의구심을 갖고 있다. 밝힐 것은 철저히 밝히고 단죄할 것은 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이런 권력의 충견 같은 조직이 발붙이지 못한다. 진정 국가와 국민에게 충성하고 봉사하는 국정원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조직 인력의 교체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나쁜 권력이 이 조직을 악용하면 어떤 벌을 받게 되는지 역사에 분명히 기록해야 한다. 그 시작은 이런 자격 미달 인사를 국정원장에 앉힌 데 대한 대국민 사죄가 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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