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사진제공: 연합뉴스

"한국 정부가 '황금알 낳는 거위'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검찰은 1995년 12월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돈을 준 혐의로 재벌총수 7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삼성 이건희 회장과 대우 김우중 회장, 동아 최원석 회장 등이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게 됐다. 이른바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다.

뉴욕타임스(NYT)는 당시 "한국 재벌 총수들이 '총알'을 피하게 됐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비자금 사건이라는 파문에도 불구하고 불구속 기소된 총수들은 모두 무죄나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서울에 주재하던 한 서방 외교관은 당시 NYT 기사에서 재판 결과를 이미 예상한 듯 이렇게 말했다. 한국 정부가 재벌에 크게 대항할 가능성을 한국인들이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그는 한국 정부가 황금알 낳는 거위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이 외교관은 또 설령 한국 정부가 재벌 총수들을 감옥에 집어 넣어도 크게 바뀔 것은 없다고 봤다. 이들이 수감돼도 얼마든지 회사를 경영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재벌 총수들의 '옥중경영'은 최근에도 낯선 일이 아니다.

NYT도 한국이 역내에서 가장 부패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명성이 자자하다고 거들었다. 또 한국 사회는 매우 관료적이어서 기업이 숨 쉴 공간을 얻으려면 뇌물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라고 소개했다.

당시 한국 경제의 대기업 의존도는 아시아지역의 다른 주요국보다 훨씬 높았다. 당시 전체 산업생산의 절반 이상을 40대 기업이 좌지우지했다는 통계가 이를 방증한다. 재벌 총수가 구속되면 한국 경제가 위태로워지는 게 아니냐는 국민들의 우려도 적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총수들은 쉽게 풀려나거나 사면받기 일쑤였다.

'세기의 재판'으로 주목받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1심 선고가 25일 나왔다. 재판부는 뇌물공여 등의 혐의를 인정하고 그에게 징역 5년형을 선고했다. 특검은 이번 사건을 노태우 비자금 사건에 빗댄 적이 있다. 이 부회장이 적어도 아직까지는 당시의 아버지와 달리 '총알'을 피하지 못한 셈이다.

이재용 판결에 대한 외신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한국 최대 재벌 총수의 부재가 삼성의 미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는 반응이 있는가 하면, 한국에서 재벌개혁은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이번 판결이 문재인 정부의 개혁 행보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주요 외신에는 대개 두 가지 반응이 모두 담겼는데 사실상 후자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에 재벌개혁이 절실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외신 반응에서 또 하나 주목할 건 이날 판결을 놓고 한국 경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블룸버그는 이날 '개드플라이' 칼럼에서 오히려 많은 한국인들이 이제는 재벌에서 비롯된 낙수효과와 이에 따른 경제적 편익을 잘 느끼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재벌이 적어도 국민들에겐 '황금알 낳는 거위'가 아니라는 얘기다.

통신은 또 한국인들이 과거에는 재벌을 일으킨 창업주들을 우상화했지만 족벌 체제 아래 쉽게 가업을 물려받은 이 부회장같은 후계자는 존경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국민정서를 재벌 봐주기의 핑계로 삼을 게 아니라는 얘기다.

블룸버그는 그러면서 한국 법원이 재벌에 강경한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문 대통령의 개혁 의제 추진력이 약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1995년 재벌 총수들이 총알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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