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범자들’ 스틸컷

TV 속 시사고발 프로그램들이 각별한 관심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MBC ‘PD수첩’과 KBS ‘추적60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등이 대표적이었는데, 이 프로그램들이 방영되는 날이면 시쳇말로 ‘본방사수’를 하려는 열혈 시청자들이 제법 많았다. 방송이 끝난 다음 날 아침이면 사람들은 그 내용을 놓고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그 이야기 속에는 분노와 질책이 있었고, 반성과 개선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신뢰와 희망의 말들이 있었다. 이 사회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우리 아이들이 더 좋은 세상에서 살 것이라는 희망.

당시는 기자와 PD들이 ‘사실’에 기초해 어떻게든 ‘진실’에 접근하려 노력하던 시절이었다.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던, 좋은 시절이었다.

그때 그 시절엔 심야에 방송되는 토론 프로그램도 꽤 인기가 있었다. 사람들은 국가적, 사회적 현안을 놓고 벌이는 치열한 논쟁을 즐겼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대화와 소통이 살아있던,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2008년 수구세력이 집권하면서 순식간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공영방송은 정권에 아부하는 부역자들로 채워졌고, 한때 ‘정의로움’을 쫓았던 기자들과 PD들은 추방되거나, 침묵했다. ‘땡전뉴스’가 부활했다. 이 사회의 나침반은 정권의 색깔에 맞게 ‘탐욕’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어제까지 ‘상식’이었던 것이 오늘 배신을 당하는 일들이 허다했다. ‘미네르바’ 사건처럼 정권을 비판하는 일반 시민들에게조차 법이라는 미명 하에 재갈과 족쇄를 채웠다.

지난 9년간 공영방송을 비롯한 수구 언론은 사람들의 ‘집단기억’을 조작하기 위해 간단한 ‘수칙’들을 수행했다. 첫째, 정권에 불리한 현안은 축소하거나 무시하거나 왜곡도 서슴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세월호’ 참사 보도였다. 둘째, 정권에 불편한 현안이 불거질 경우 다른 현안으로 관심을 돌렸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과 관련한 보도들이 대표적이다. 당시 공영방송은 국정원의 하수인처럼 행세했다. 셋째, 정권에 조금이라도 유리할 것 같은 사안은 과대 포장했다. MB의 자원외교 쇼가 그렇고, GH의 낯 뜨거운 외교패션쇼가 그렇다. 이들을 미화하기 위한 그 진부하고도 교묘한 노력들이 9년간 자행됐다.

어느덧 외면, 침묵, 왜곡, 미화가 공영방송의 키워드가 됐고, 이들 방송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멀어졌다. 어느 누구도 어젯밤 방영된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놓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은 MBC에 ‘엠X신’이란 별칭을 붙여줬다.

엊그제 MBC 해직 프로듀서(PD)인 최승호 감독이 연출한 영화 ‘공범자들’이 개봉했다. 첫날에만 1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인기몰이를 할 기세다. 전국에 186개에 불과한 스크린에서 거둔 성과다. ‘공범자들’은 공영방송 KBS와 MBC를 몰락시킨 주범과 그 공범자들의 실체를 추적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 김재철 전 MBC 사장, 김장겸 MBC 사장, 고대영 KBS 사장 등이 등장한다.

예상한 대로 영화가 개봉에 이르기까지 순탄치만은 않았다. 지난달 MBC 전·현직 임원들이 명예권 침해를 이유로 법원에 영화상영가처분신청을 접수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사람들이었다면 애초 공영방송이 이처럼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법원이 가처분신청 기각 결정을 내렸는데 재판부의 판결 사유가 자못 흥미롭다.

재판부는 “‘공범자들’이 MBC 임원들을 표현한 내용이 허위사실이라고 볼 수 없고, 사실에 기초해 공적 인물들을 비판하고 의문을 제기했을 뿐”이라며 이들에게 ‘명예권’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다. 특히 재판부는 “MBC 임원들은 비판이나 의문에 적극적으로 해명할 지위에 있는데도 이 같은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은 채 명예권이 침해됐다고만 주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영방송 간부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 하지 않는 태도를 강하게 질타한 것이다. 아울러 “‘공범자들’이 상영됨에 따라 MBC 임원들을 향한 비판 여론이 강해지고 과거 행적이나 발언이 재조명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는 언론인으로서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재판부의 판단은 백번 옳다. 이것이 상식이다.

MBC 기자와 PD, 아나운서들이 총파업에 돌입한다고 한다. 명예를 회복할 사람은 다름 아닌 이들이다. 상식이 다시 승리하기를 기원한다. 정의로운 공영방송이 국민들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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