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환 삼영화학그룹 명예회장 / 사진제공: 연합뉴스

지난달 말 제주도에서 93세의 남성이 50대 중년 여성을 넘어뜨리고 주먹으로 구타한 사건이 벌어졌다. 폭행 장면은 인근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에 고스란히 찍혔다.

경찰은 가해 남성을 조사한 뒤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피해 여성은 사건이 벌어진 배경을 공개했다. 남성이 사업 투자금 200억원을 미끼로 성관계를 요구해왔으며 투자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항의하자 폭행을 가했다는 것이다.

남성 측도 해당 여성을 무고와 명예훼손, 폭행 등 혐의로 맞고소했다. 이 남성의 정체가 충격적이다. '구순의 기부왕' 관정(冠廷) 이종환 삼영화학그룹 명예회장.

그가 지난 2000년 사재를 털어 설립한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은 17년 만에 자산 규모 8000억원이 넘는 아시아 최대의 교육재단이 됐다.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장학 사업을 시작해 지난해까지 8851명에게 1932억원을 지원했다.

삼영화학그룹 오너 일가는 보유 주식을 꾸준히 매각해 재단 자산을 불려 왔다. 이 때문에 이 명예회장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갑의 횡포 대신 상생과 공존의 가능성을 보여준 상징적인 인물이 됐다. 2015년에는 600억원을 들여 지은 도서관을 서울대에 기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이 명예회장은 한 여성에게 갑질을 일삼은 파렴치한으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다. 피해 여성이 주장하는 내용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말이다.

이 명예회장에게 적용된 혐의의 진위 여부와 별개로 한국 사회에서 상생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 사례를 찾기란 좀처럼 어렵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증명됐다.

"재물은 분뇨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 때문에 견딜 수 없지만 골고루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조선 중기부터 300년 넘게 대대로 만석꾼이었던 경주 최부잣집의 12대손 최준 선생의 입버릇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백산무역주식회사를 만들어 상하이 임시정부 등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전 재산을 쾌척해 영남대학교를 설립했다. 거부(巨富)의 삶을 마다하고 신음하는 민초들과 더불어 사는 상생을 실천한 것이다. 최준 선생이 1970년 별세한 것을 감안하면 우리 사회에서 상생 DNA가 희미해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100일을 맞았다. 정부 출범 이후 갑질 청산과 상생 도모에 전력을 기울여 왔다.

그 와중에 가맹점주를 압박해 자살로 내몬 대형 프랜차이즈 업체 회장, 국민 세금을 쌈짓돈처럼 쓰다가 불명예 퇴진한 검찰 고위 간부, 공관병에게 전자팔찌를 채우고 관노(官奴)처럼 부린 육군 대장과 그 아내 등의 사례가 밝혀져 국민적 공분을 샀다.

온갖 갑질 행태가 하루가 멀다 하고 민낯을 내보이면서 불과 10개월 전 한국 사회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갑질 끝판왕'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관심과 분노가 옅어졌다고 느껴질 정도다.

정의와 상생의 기치를 내걸고 집권한 문재인 정부가 초심을 잃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나 가진 자들이 되새겨야 할 덕목이 있다. 경주 최부잣집이 12대에 걸쳐 실천한 6가지 가훈(六訓)이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는 첫 가훈은 관직과 돈을 모두 탐해선 안 된다는 정경 분리의 원칙이다. 권력과 재력이 결합해 공통의 이해를 도모할 경우 국가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불과 얼마 전 목도했다.

'만석 이상의 재산은 모으지 말라'는 가훈은 자기 절제와 함께 상생 추구를 의미한다. 또 '흉년기에 재산을 늘리지 말라'는 남의 위기를 틈타 축재(蓄財)하는 행위의 몰염치함을 드러낸 것이다. 공정 경쟁을 강조한 것인데 각계에 갑을 관계가 광범위하게 형성돼 있는 현 상황을 감안하면 의미심장하다.

이밖에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소통 강화를, '사방 100리 내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구휼(복지 확대)의 중요성을 후세에 알리는 가훈이다. 마지막으로 '시집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으라'는 가훈은 손에 쥔 부를 천박하게 드러내지 말라는 의미다.

곱씹어 볼수록 울림이 작지 않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듯 구태와 적폐, 갑질의 종식을 선언한 문재인 정부의 출범과 함께 시작된 우리 안의 상생 DNA 찾기 여정이 5년 후 어떤 모습으로 귀결될지 기대감을 갖고 동참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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