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보 염상섭의 소설 '삼대(三代)'는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만석꾼 조씨 가문의 흥망성쇠를 그린 작품이다.

조부 조의관은 구한말 세계관과 지나친 물욕(物慾)에 사로잡힌 전형적인 구시대 인물이다. 부친 조상훈은 위선적인 개화 지식인, 아들 조덕기는 변화하는 세태를 인지하고도 구시대 이념에 부화뇌동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로 묘사된다.

조씨 3대는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데 성공하지만 세대 갈등과 정체성 혼란 등으로 점차 몰락해 간다. 염상섭은 한 가족의 역사를 통해 혼란했던 시대상을 표현하려 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뇌물죄 등으로 기소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징역 12년을 구형했다. 이 부회장의 1심 선고는 오는 25일로 예정돼 있다. 지난 2월 구속 수감된 지 6개월 만에 운명의 갈림길에 섰다.

징역 12년이라는 구형량은 김우중 전 대우 회장에 이어 재벌 총수 중 두번째로 높은 형량이다. 지난 2006년 검찰은 20조원대 분식회계와 10조원 규모의 사기대출 혐의 등으로 기소된 김 전 회장에게 징역 15년과 추징금 23조원을 구형했다. 1심 판결 결과는 징역 10년에 추징금 21조원이었다.

이병철·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3대는 비리 혐의로 사법 처리 대상이 되는 잔혹사를 겪고 있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세대가 거듭될수록 처벌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병철 전 회장은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지만 기소되지는 않았다. 대신 차남인 이창희 당시 한국비료 상무가 아버지를 대신해 6개월 간 수감 생활을 했다.

2대인 이건희 회장은 두 차례에 걸쳐 불구속 기소된 전력이 있다. 1995년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조성 의혹에 연루돼 수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져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2007년에는 삼성 비자금 특검 수사 결과 배임 등 혐의로 기소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판결을 받았지만 1년 뒤 사면됐다.

3대인 이 부회장은 삼성 총수 일가 중 최초로 법정 구속되는 사례를 남겼다. 구형량도 징역 12년으로 조부와 부친의 전례를 훌쩍 뛰어넘는다. 재판부가 뇌물죄를 인정할 지가 관건인데 유죄라면 중형이 불가피하다.

삼성 총수 일가에 대한 사법적 잣대가 갈수록 엄격해지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개발독재 시대에서 경제민주화 시대로 전환되면서 정경유착과 재벌비리를 바라보는 국민적 인식이 달라졌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병철 전 회장은 사재를 국가에 헌납하고 일시적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 정도로 처벌을 피했지만 이건희 회장은 집행유예를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현재, 한국 사회는 이 부회장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더이상 아량을 베풀어선 안 된다고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 부회장이 개발독재 시대 이념에 갇힌 박근혜 전 대통령의 불합리한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순응했다는 점이다. 마치 소설 삼대 속 조덕기처럼 머리로는 세상이 바뀐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부와 부친의 경영행태를 보고 자라며 자연스럽게 체화된 본능을 이겨내지 못했다.

이 부회장도 지난 7일 열린 결심 공판에서 최후진술을 통해 후회했다. 그는 "삼성이 잘못되면 안 된다는 중압감에 매진했지만 성취가 커질수록 국민과 사회의 기대는 더 엄격해질 수밖에 없다는 부분을 놓쳤다"고 진술했다.

이어 "사회에서 인정받고 나아가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기업인이 되고자 다짐했는데 뜻을 펴보기도 전에 법정에 먼저 서게 돼 만감이 교차하고 착잡하다"는 소회를 밝혔다. 진술을 하는 동안 이 부회장은 두어차례 울먹이기도 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문호 토마스 만의 소설 '부덴부로크가의 사람들'은 작가의 고향인 뤼베크의 상인 부덴브로크 가문 4대 100년에 걸친 이야기다. 가문은 1대 부덴브로크의 탁월한 수완으로 축재(蓄財)에 성공하지만 이후 자손들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으로 망하고 만다.

창업 이후 수성 과정에서 기업가 정신을 잃고 무너지는 기업이 많은데 우리는 이를 부덴브로크(Buddenbrooks) 현상이라고 부른다. 100년 기업이 드문 이유다.

우리는 모순적인 함의의 두 속담을 안다. '부자 3대 가기 어렵다'와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 이 부회장의 유·무죄가 갈릴 1심 선고까지 16일 남았다.

삼성 총수 일가 3대의 잔혹사는 결국 새드엔딩으로 마무리될까. 아니면 기사회생 끝에 새로운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뉴(New) 삼성이 한국 사회에 출현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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