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원유시장은 한동안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독무대였다.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OPEC은 국제유가가 떨어질 때마다 공급 물량을 줄이며 유가를 띄어 올렸다. 반대로 국제유가가 급등할 때는 원유를 볼모로 삼아 정치적 영향력을 뽐냈다. 

1973년 터진 4차 중동전쟁이 대표적이다. 아랍의 주요 산유국은 이 전쟁을 계기로 원유 생산 제한, 수출 금지 조치를 취했다. 이른바 ‘1차 석유파동’의 배경이다. 에너지 안보에 위협을 느낀 미국은 1975년 원유 수출을 전면 금지했다.

최근 국제 원유시장에서 OPEC의 영향력이 부쩍 약해졌다는 얘기가 많다. 25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도출된 감산 연장 합의에 따른 시장 반응이 이를 방증한다.

OPEC과 러시아 등 주요 산유국은 감산 합의를 9개월 연장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11월 오는 6월까지 산유량을 하루 180만배럴 줄이기로 한 합의가 내년 3월까지 연장됐다. 주요 산유국은 2014년 중반 이후 반 토막 난 유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공급과잉을 해소해 수급 재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입장이다.

국제 원유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국제유가는 최근 감산 합의 연장 기대감에 배럴당 50달러선을 회복했지만 이날 5% 가까이 급락했다. 이 바람에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가격은 한 달 만에 배럴당 50달러 선이 무너졌다. 감산 규모와 기간이 시장 기대에 못 미쳤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선 사우디와 러시아 등 전통적인 주요 산유국이 이미 원유시장의 주도권을 잃었다는 진단이 나온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미국 셰일업계가 원유산업을 ‘제조업’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고 지적했다. 

셰일은 단단한 진흙 퇴적암층이다. 여기서 원유나 천연가스를 추출하려면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들어 셰일원유 개발은 한동안 경제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프래킹'이라고 하는 수압파쇄법이 개발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수압파쇄법은 말 그대로 모래, 화학약품 등을 섞은 혼합액을 고압 분사해 퇴적암층을 깨고 원유와 천연가스를 추출하는 방식이다. 덕분에 셰일원유를 추출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비용이 혁명적으로 줄었다. 2014년 중반 이후 국제유가가 급락한 것도 셰일원유가 급증한 데 따른 것이다. 주요 산유국은 이때까지 미국 셰일업계의 진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더 주목해야 할 건 미국 셰일업계가 글로벌 금융시장의 본산인 월가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대개 PEF(사모펀드) 운용사나 연기금 같은 기관투자가의 지원을 받는다. 돈벌이에 능숙한 이들은 옵션·선물시장을 통해 국제유가가 오를 때나 내릴 때나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헤징(위험회피) 전략을 갖고 있다. 덕분에 미국 셰일업계는 국제원유시장의 변동성에 맞서 안정적으로 원유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원유 생산은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는 것만큼이나 예측 가능성이 커졌고 이는 투자 매력을 극대화했다. 투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환경이 호전되면서 국제유가에 대한 저항력이 커진 셈이다. 

그 사이 전통적인 산유국의 수급 통제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수급 조절로 국제유가를 띄어 올리겠다며 단행한 감산은 오히려 미국 셰일업계에 더없이 좋은 호재가 됐다. 

일각에선 미국 셰일업계의 취약성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증산 바람에 따른 노동력 및 장비 부족으로 시추 비용이 늘어날 수 있고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금리인상이 투자 바람에 제동을 걸 수 있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과잉생산이 결국 국제유가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도 흘려 들을 수는 없다.

다만 현 시점에서는 미국 셰일업계가 승기를 잡은 건 확실해 보인다. 전통산업 후발주자가 시대 흐름에 맞춰 진화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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