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을 피해 학원으로

어제로써 길다면 길었던 설 연휴가 막을 내렸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나흘간의 연휴를 잘 보내셨는지 모르겠다. 우리에게 명절은 어떤 의미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의 일반적인 관념 속에서 명절의 이미지는 따뜻하다. 가족과 이웃 간의 정이 있고, 덕담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풍성한 날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명절의 의미가 달라지고, 명절을 쇠는 풍경도 바뀌고는 있지만, 누구라도 명절은 마땅히 행복하고 따뜻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청춘들에게 명절은 ‘대피’해야 하는 전쟁 같은 날이기도 하다. ‘명절 대피소’라는 말을 혹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다. 명절에도 취업 준비에 바쁜 청년들이 눈치 보지 않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이라고 한다. 주로 이런 공간들은 학원가에 산재해있고, 이번에 한 어학원에서는 비수강생에게도 설 연휴 동안 쾌적한 학습 환경을 제공한다는 공지를 올리기도 했다. 그만큼 눈칫밥에 시달리는 청춘들의 명절 스트레스가 상당하다는 뜻이겠지만, 대피한 공간이 결국 학원이라는 것도 실은 다소 불편하게 느껴진다.

너 취직은 했니?

이제 명절은 청춘들에게 마냥 설레고 반가운 날이 아니다. 청년실업률이 상승하고 취업난이 가중되면서 해마다 돌아오는 명절은 청춘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취업준비생들은 가족들의 과도한 관심과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자괴감 때문에 힘겨워한다. 그리고 자신에 비해 번듯하게 살아가는 다른 가족들과 비교되길 두려워한다.

한편 결혼과 출산 계획을 묻는 어른들은 젊은 조카가 그들과는 다른 나름의 인생관을 갖고 있다는 걸 쉽게 간과한다. 결혼과 출산에 별 뜻이 없어 보이는 젊은 세대들을 보며 놀라기도 한다. 또한 결혼의 통로에 놓인 여러 경제적인 문제들을 토로하는 청춘들에게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결국엔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라는 식으로 끝맺곤 한다.

누군들 취직을 안 하고 싶을까. 누군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오순도순 사는 삶을 바라지 않을까. 물론 최근에는 ‘자발적 비혼’이라고 하여, 스스로 결혼과 출산을 지향하지 않는 이들도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비혼’이 보편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아직까지 많은 이들은 취업, 결혼, 출산에 이르는 보통의 인생 행보를 따르기를 바란다.

청춘들이 맞닥뜨리는 문제들은 그들의 현재 삶 전체에 고착화되어있다. 청춘들이 명절을 꺼리는 것은, 좋은 명절날에 딱지처럼 붙어있는 압박감을 누군가 다시 들추는 게 싫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 사람들이 피로 맺어진 가족일지라도 말이다.

잔소리와 덕담 사이

어찌 보면 가족들의 입장에서는 딱히 꺼낼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통 얼굴도 못 보던 사람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이게 되면 서로의 근황부터 묻게 마련이다. 하지만 단순히 근황만을 묻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선을 넘게 되는 것이 문제다. ‘요즘 어떻게 지내니?’라는 질문이 ‘왜 그렇게 지내니?’라는 핀잔이 되고, 끝내는 ‘그렇게 지내서야 되겠니?’라는 훈계로서 귀결된다. 그러고 나서 이어지는 덕담들이 사실상 귀에 들어올 리 없다.

‘가족으로서 그런 것도 못 물어보느냐, 가족이니까 이런 말도 해주는 것이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소엔 거의 연락 한 번 주고받지 않다가, 명절날이 되어서야 가족으로서의 관심과 역할을 운운하는 것이 조금 우습기도 하다. 어디까지나 잘 되라는 마음에서 덕담을 나눈다고는 하지만, 지금같이 어려운 시대에 덕담과 잔소리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청춘들에게 따뜻한 명절이 왔으면

안타까운 현실이다. 사실상 청춘에게 따뜻한 명절을 돌려주는 방법은 청춘들이 웃을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들이 눈치 보지 않고 기죽지 않도록 말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런 미래는 아직 요원하게만 느껴진다.

덕담에도 이해와 배려가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취업을 준비하고,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우리 집안 아이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섬세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무심코 건넨 덕담이 상처를 건드릴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청춘들을 그저 어른으로서 따뜻하게 보듬어주면 되지 않을까. 단지 명절 동안만이라도 편안히, 밥 맛있게 먹고 가라고 이야기해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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